주부는 9단, 기자는 초보인 동작맘들이 만들어가는 매거진

우리 사는 세상_동작맘 경단녀 탈출기 <다시, 직업으로>

<우리 사는 세상>


동작맘 경단녀 탈출기
다시, 직업으로

글 | 그림 범쇠•이혜경(대방동)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두아이 엄마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나는 콘티를 보고 레이아웃이 나오면 감독님께 소재를 넘긴다. 총감독의 연출이 넘어오면 각 작화 감독들에게 커팅 소재를 넘기고, 소재가 나오면 총 감독에게 그리고 작화팀으로 동화팀으로 칼라실로 원활하게 커팅 소재를 넘기는 일 을 하고 있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나면 촬영실로 가고, 테이크1 촬영을 한다. 30분짜리 TV판 애니메이션 1편이 만들어지는 작업은 길게는 한 달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난 애니메이션회사에서 진행을 맡고 있다. 회사에 재입사 한지는 2년이 지났다. 물론 처음부 터 진행을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디자인 경력도 있고,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동화’ 쪽의 경력이 10년 정도 있는 나름 베테랑 경력자였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육아에 집중하면서 5년을 쉬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놓은 지도 5년...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일에 대한 욕심은 항상 있었지만 그 전처럼 신나게 일할 자신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20여년의 직장 생활, 결혼, 출산 그리고 시댁 식구들과의 지독한 갈등과 육아로 인해 내 삶이 이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큰딸이 두 살 때쯤, 친정엄마의 대장암 발병 소식은 겨우겨우 하루 를 버티며 사는 나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딸아이를 들쳐 업고 친정으로 달려가 엄마의 수술과 입원, 퇴원까지 보고나니 한 달이 흘러 있었다. 그 일이 2012년 10월이었다. 그렇게 친정에 다녀온 후 용 산역에 내려 전철을 기다리는데 열차가 들어오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이번 열차는 천국행, 천국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벤치에 힘 없이 주저앉아 있던 내 귀에 ‘천안행’ 열차가 ‘천국행’ 열차로 들린 것이다. ‘이젠 헛소리가 들리는 구나’ 하고 전철에 올랐다. 대방역까지 두 정거장. 아이를 안고 힘들게 서 있는 아기엄마에 게 그 누구도 자리 양보 따윈 없었다. 손잡이에 기대어 전철 안쪽 벽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때 까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그냥 흔한 광고 중에 하나였다. [중부기술교육원]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과정 이란 문구가 딱 보였고. 난 바로 지원해서 합격 했다. 애니메이션은 원래 했던 일이지 만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고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2013년 1년 여의 교육원 생활은 너무 즐겁고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 전만 해도 시간 따윈 무의미 했고 나의 자 존감은 바닥이었다. 내 이름 조차도 지워져 있었다. "민정엄마"가 내 이름이었다. 다시 “이혜경 씨”라는 내 이름을 찾아 즐겁게 수업에 임했다. 두 달 만에 자격증도 땄다. 과내에서 실력을 인정 받을 때마다 자존감도 올라갔다. 그리고 수료할 때 2개의 그래픽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 

재입사한 회사는 그 전에 다녔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청이 아닌 일본 회사와 직접 일을 하는 것도 많이 달라진 점이다. 콘티를 알아 보려면 일본어는 필수로 해야 했고 일을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작화팀과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작화팀 팀원들을 보니 회사가 활기차 보이기도 하고, 그 젊음과 투지가 부럽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때가 제일 빛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일을 하는 동안 팀원들이 반짝반짝 빛나는걸 보니 눈이 부셨다. 재입사 후 2년 동안 많은 동료들이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거나, 다시 돌아오거나 아니면 끝까지 남았다. 어떤 일이 진짜 자기 한테 맞는지 정답은 모른다. 여자라서 직업선택의 여지가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생존에 있어서 남녀를 불문하고 선택이 가볍지는 않다. 이 일이 나의 전업이라 여기는 어린 팀원들에게 배울 점도 많다. 

내가 선택했고 행복을 주는 ‘그리는 일’ 을 이젠 포기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의 즐거운, 나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 내일도 회사에 출근하면 팀원들이 밤새 일한 커팅 소재를 다음 단계로 넘기고, 엑셀 작성을 하고, 콘티를 보면서 사전도 찾아야 한다. 또 사무실에서 키우는 고양이 밥도 주고, 간단하게 청소도 하면서 바쁘게 돌아다니겠지만 회사 생활은 지겹지 않다. 시간을 조금 내서 내 그림도 그려볼 생각이다. 진정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나를 발견할 때까지 나는 그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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